이 창을 다시 열지 않음
글로벌선교방송단배너
이 창을 다시 열지 않음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신년배너
사이드배너1
GOODTV와 함께 미디어 선교사가 되어주세요. GOODTV는 세상의 모든 미디어 사역을 찾아 어둠을 밝히고 세상에 희망을 전합니다!
  • 문화예술단
  • 상해사범대
  • 성서대학교
  • 디라이브
  • USI신학교
  • 데일리굿뉴스
설교방송설교방송1설교방송2설교방송3
뉴스
[기획] 대한의 여성은 독립운동의 주인공이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다. 이에 본지는 종파를 초월한 연합운동으로 민족 독립의 불을 지폈던 3·1운동의 의미를 조명하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하늘을 누비고 교육에 힘썼던 기독인 여성들. 이들은 험난한 독립의 길을 걸으며 자신의 모든 생을 바쳤다. '독립'이라는 이길 것 같지 않은 싸움에 수많은 사람이 포기하고 변절의 길로 돌아섰지만 묵묵히 나라 사랑의 길을 걸어간 여성들의 삶을 통해 3·1절의 참된 의미를 되새겨 본다. 대한의 잔 다르크, 김마리아(1892~1944)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은 "한 민족이 그들 국가의 독립 문제를 스스로 결정짓게 하자"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선언한다. 그해 11월 11일 종전이 선언되고 전쟁 이후 세계질서를 정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이듬해 1월부터 열릴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진다. ▲영문 이니셜이 새겨진 미국 유학시절 김마리아의 사진 (사진=국가기록원) '조선 독립의 기회가 찾아왔구나' 김마리아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김마리아를 비롯한 재일 유학생들은 독립선언을 위한 준비에 돌입해 2월 8일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많은 학생이 잡혀가고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는다. 2·8독립선언의 중심에 있던 김마리아는 일본 경찰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기모노를 입고 현해탄을 건넌다. 그의 품속에는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이 감춰져 있었다. 부산에 도착한 그는 전국을 돌며 동포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했다. 특별히 여성의 역할과 참여를 독려했다. 3월 1일의 거국적인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져가던 3월 5일 김마리아는 남대문 앞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이 일을 계기로 검거된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온갖 고초를 겪게 된다. 출소 후 김마리아는 모교인 정신여학교에서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한다. 그는 대한애국부인회 취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한 사람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할 목표를 향해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다." 대한애국부인회에 수많은 사람과 자금이 모였다. 회원은 2,000여 명을 헤아렸고 6,000원의 성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하지만 밀정의 고발로 애국부인회의 활동이 좌초되고 김마리아는 또다시 고초를 겪게 된다.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생사를 헤매던 그는 보석으로 풀려나게 되고 임시정부의 도움으로 상해로 탈출한다. 몸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에서도 김구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 대의원으로 활동하며 항일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상해 활동을 마무리하고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간 김마리아는 파크대학, 시카고대학, 컬럼비아대학 등에서 사회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민족지도자가 되기 위한 실력을 쌓기에 매진했다. 그 와중에도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결집해 '근화회'를 조직하는 등 재외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이런 그녀를 두고 도산 안창호 선생은 "김마리아 같은 여성 열 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을 이뤘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1933년 10여 년 만에 학업을 마친 김마리아는 조국으로 향했다. 원산에 도착한 그는 마르다윌슨 신학교에 부임해 신학을 가르치며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모진 고문과 오랜 해외 생활로 몸이 상한 김마리아는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대동강 물에 뿌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순국했다. ▲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과 함께한 권기옥(오른쪽에서 두 번째)지사의 모습(사진=국가기록원)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1901~1988) 1917년 서울 여의도 상공에서는 미국인 아트 스미스 커티스가 곡예비행을 펼쳤다. 구경에 나선 경성 사람들은 육중한 비행기가 신묘한 연기를 펼치며 이리저리 나는 모습에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그때 열여섯 소녀 권기옥은 민족을 위한 꿈을 갖게 된다. '나는 비행기 타는 공부를 하여 폭탄을 안고 일본으로 날아가리라!' ▲1935년 중국 선전비행을 앞둔 무렵의 권기옥(사진=국가기록원) 이후 그는 평양 숭의여학교에 다니며 '조종사'와 '독립'이라는 꿈을 키워갔다. 그는 숭의여학교 교사였던 박현숙 선생의 권유로 비밀결사대 '송죽회'에 가입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항일 독립운동의 길을 걷게 된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신흥식 목사의 지휘 아래 일본인 사감의 눈을 피해 기숙사 안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애국가 가사를 찍어내는 등 만세운동 준비에 힘을 보탰다. 그는 3월 1일 평양 숭덕학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의 대열에 앞장서 나섰다가 평양경찰서에서 3주의 구류처분을 받고 구금됐다. 출소 후 임시정부 산하 청년단원이었던 문일민, 장덕진으로부터 평남도경(오늘날 도청) 폭파를 도와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이들과 함께 폭탄을 제조하고 운반하는 일을 돕다가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엔진도 없는 멸치잡이 배를 타고 상해로 탈출했다. 상해에 도착한 권기옥은 임시정부 손정도 의장의 집에 머물며 학업을 이어갔다. 1923년에는 독립전쟁을 위한 군관 양성을 추진했던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운남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게 됐다. 당시 중국에는 군벌들이 세운 네 곳의 비행학교가 있었다. 그중 두 곳은 권기옥이 여자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했고 ‘쑨원’이 세운 광동항공학교에는 비행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학교는 중국 서남단 후미진 곳에 있는 운남육군항공학교뿐이었다. 그는 임시정부 이시영 선생이 써준 추천서를 가지고 중국을 가로질러 운남성으로 향했다. 가는 데만 꼬박 한 달의 시간이 걸렸다. 추천서를 들고 교장인 ‘당계요’와 담판을 벌이는데 당계요는 여성의 몸으로 비행사가 되기 위해 찾아온 조선 여성의 용기에 입학을 허가했다. 그녀의 나이 스물셋, 1917년 서울 하늘에서 비행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지 꼭 6년 만의 일이었다. ▲1935년 중국 선전비행을 준비하던 무렵의 권기옥(왼쪽에서 두 번째), 가운데 이탈리아 교관, 중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 이월화와 함께 (사진=국가기록원) 혹독한 비행훈련과 ‘여류 조종사’가 있다는 소문이 퍼져 일제의 암살시도가 이어지는 등 위기 가운데서도 1925년 비행학교를 졸업하여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가 됐다. 상해로 돌아간 그녀는 임시정부의 비행기를 타고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기 원했지만 여의치 않자 중국 공군에 들어가 10년간 활약했다. 이때의 활약을 눈여겨본 중국 국민당 총통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은 그에게 중국 청년들 독려하기 위한 선전비행을 제안한다. 선전비행은 상해에서 북경, 동남아시아를 거쳐 일본까지 날아가는 경로였다. 권기옥은 선전비행의 마지막 순간 기수를 돌려 일왕의 궁을 폭격할 뜻을 굳힌다. 하지만 중국 국내 정국이 불안해져 선전비행이 무산되자 일본출격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해방 이후에는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힘을 보탰다. 조국이 사라져버린 황량한 땅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불굴의 삶을 살아낸 김마리아와 권기옥. 이들의 활약은 이 땅의 여성들이 누군가의 어머니, 누나가 아닌 조국독립의 당당한 주역이었음을 보여준다. 용기와 기개로 자신들의 이름을 민족사에 아로새긴 두 여성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준다.

경기도 성남시 소재 분당횃불교회(구 분당흰돌교회) 이재희 목사에 대해 △조상의 저주 및 예언을 빌미로 한 헌금 강요 △횡령 △폭행 등 20여 가지 의혹이 제기됐다.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기독교복음선교회, 일명 JMS에 교회 건물을 매각했다는 의혹도 포함됐다. 분당횃불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보수합동 국제(이하 예장합동 국제) 교단 소속이다. 분당횃불교회 이재희목사 수사촉구연대회의(이하 수사촉구연대회의)와 바른교회세우기행동연대(사무국장 정상규)는 19일 경기도 성남시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재희 목사에 대한 수사를 촉구했다. 이들은 이 목사에 대해 폭행, 외화 반출, 업무상 횡령 등 의혹을 제기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20여 명의 교인들이 피해 증인으로 나섰다. 분당횃불교회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 대표 정정희 장로는 이재희 목사가 '조상의 저주'를 내용으로 한 예언을 통해 교인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해 재산을 교회에 바치도록 종용했다고 말했다. 정 장로는 “이재희 목사는 교회가 경매에 넘어가게 생겼는데 돈이 없으면 장기매매를 해서라도 헌금하라며 수차례 강단에서 헌금을 종용하는 설교를 했다"며 "교회 설립 이후 20년이 넘게 한 번도 재정보고가 없었고 공동의회 등도 열리지 않았으며, 지출에 대한 모든 결정은 이재희 목사와 측근인 강미애, 이민희 장로 세 사람만이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실제 피해자들은 이보다 3배는 더 많지만 이재희 목사가 반복해서 주입한 저주의 말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며 "기자회견에 참여한 한 집사에게 이재희 목사는 '교회를 비방하고 다니니 당신 남편이 죽을 것'이라며 몇 시간 동안 저주의 말을 했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주신 예언이라는 명목으로 교인들에게 헌금을 빙자한 헌신을 강요한 정황에 대한 증언도 나왔다. 청년 예언사역자로 뽑혀 별도로 '예언 훈련'을 받았던 박선아 씨는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분당횃불교회에 출석했다고 밝힌 박 씨는 "환상과 음성을 듣지 못하는 데도 예언자로 세워진 것에 대해 항상 의문점이 있었다"며 "공예배 때 강단에 불려나와서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재산을 바치라고 말씀하셨다는 예언을 해야 했다"고 증언했다. 그에 따르면 분당횃불교회는 이재희 목사의 딸 홍슬기 전도사 등 3명의 예언자를 세워 가짜예언을 하도록 지시했다. 박 씨는 “이재희 목사는 예언자들을 일주일에도 수차례 불러서 하루에 10시간 넘게 대화를 나누며 교인들의 상황에 대해 세뇌를 시킨다”며 "예언자들이 교인들에게 하는 대부분의 예언은 물질적으로 더 헌신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내용"이라고 밝혔다. 대책위 측은 예언 내용을 녹취한 테이프를 증거자료로 제출했다. 분당횃불교회가 현 도촌동 건물로 이전하기 전에 백현동에 건축한 교회 건물을 이단 단체 JMS에 매각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정정희 장로는 “도촌동으로 교회가 이전한 뒤 몇몇 교인이 백현동 교회 건물을 방문했는데 영상에 정명석 씨 얼굴이 계속 나왔다”며 “이재희 목사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묻자 ‘모르고 팔았다'고 할 뿐이었다”고 말했다. 기자회견 후 분당횃불교회 이재희 목사의 입장을 듣기 위해 교회로 찾아갔지만, 만날 수 없었다. 교회 사무실 관계자는 현재 담임목사 및 부목사들이 모두 부재중이라고 전했다. 이재희 목사에게 수차례 연락을 취했으나 전화도 받지 않았다. 이재희 목사는 과거 소속 교단인 예장합동 국제총회 총회장을 지냈으며, 지난해 11월 성남시기독교연합회 회장으로 추대됐다. 한편 대책위는 오는 21일 교회개혁평신도연대 등 단체와 개인 포함 345명의 연대 서명을 받은 이재희 목사 수사촉구서를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에 제출할 예정이다. ▲19일 오후 1시경 분당횃불교회를 찾아갔지만 이재희 목사를 만날 수 없었다.ⓒ데일리굿뉴스

목회정보
온라인성경찬송
성경 읽기
성경 읽기
온라인 찬송
온라인 찬송
성경 사전
성경 사전
성경 타자
성경 타자
서비스소개
다번역성경찬송
위성방송
iptv cabletv
스마트티비
방송참여및광고문의
협력단체
GOODTV 채널 LGU+ 송출 기념 EVENT!!